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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지신밟기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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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지신밟기 소개

역사

수영지신밟기 소개 수영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에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있던 군사도시였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긴 세월 동안 왜적으로부터 국토를 방어해왔던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던 곳이었다. 지리적으로는 수영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강의 하류에 위치하여 농사와 어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고장이었다.

그래서 조선 중기 현종조(1670년, 현종 11년)에는 수영성과 수영강의 호안을 재수축하고, 강의 하류에는 수군(水軍)이 주동이 되어 어민과 함께 협동하여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어방(漁坊)이란 기구를 두었고, 수영강 유역의 기름진 농토에서 효과적인 농경을 이루어 내기 위해 수영성의 남과 북에 각각의 농청(農廳)을 두어 많은 소출을 거두어 들였다.

바다와 육지에서 이러한 생산 작업을 할 때 없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 농악이었다. 수영의 <지신밟기> 는 정확한 역사를 알 수 없지만, 이미 이때에 풍물을 사용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에 <수영야류> 란 민속 가면극을 놀면서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신밟기> 를 놀아 걸립(乞粒)을 했음도 자명하다. 이러한 역사적인 바탕 속에 수영의 <지신밟기> 가 전승되어 왔으므로 그 역사는 적게 잡아도 250~300여년이 된다.

수영야류의 소개


수영지신밟기 소개

재현의 취지

수영지신밟기 소개 수영은 강과 바다와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는 역사 깊은 고장으로 조상 전래의 전통문화를 전승해오고 있는 지역이다. 수영의 중심지에는 오래된 수영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시대 큰 시장으로 알려진 오일장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 때부터 살아온 곰솔과 푸조나무가 연륜을 자랑하며 청청하고, 임진왜란 때 이 고장을 지키다 산화한 25분의 영령들이 의용사(義勇祠)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좌수영어방놀이"와 "수영야류" "수영농청놀이" 등의 무형문화재가 전승되고 있는 전통문화의 고장이다. 이러한 역사 깊은 고장에 오래 전부터 농사(農事)와 어업(漁業)에 풍요(豊饒)를 빌고, 주민들의 안과태평(安過太平)과 복락을 위해 해마다 정초의 세시풍속으로 "지신밟기"를 해왔었다. 이 놀이는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만의 놀이가 아니라 수영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참여하는 축제(祝祭)의 민속놀이였다. 왜냐하면 이 놀이를 시작으로 정월 대보름의 화려한 명절놀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놀이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단절되었다가 근년에 들어 이 지역의 전통 축제인 <수영전통달집놀이> 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신밟기> 도 병행해 주었으면 하는 요청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전통문화가 위축 내지 소멸해 가는 현 시점에서 이러한 놀이를 재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과제라 생각하고, 지역민들이나 관광객들에게 조상 전래의 전통 민속놀이를 재현해 보인다는 사명감에서 "수영지신밟기"를 재현하게 되었다.

수영야류의 소개


수영지신밟기 소개

유래

수영지신밟기 소개 수영지역에서 행하는 민속예능인 수영야류, 좌수영어방놀이, 수영농청놀이의 구조와 민속적 의미 내지 그 기능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영지방에 현전하는 여러 민속 가운데 민간신앙(民間信仰)인 <수영지신밟기>를 빼놓을 수 없다.

민간신앙이란 민간에서 행해지는 신앙관습을 총칭한 것으로, 크게 말해 가신신앙(家神信仰), 동신신앙(洞神信仰), 무속신앙(巫俗信仰) 등이 있다. 가신신앙이란 가정마다 집안의 재액초복을 위해 모시고 있는 신격으로 성주신, 제석신, 조왕신, 삼신, 업신, 지신(터줏대감), 우물신, 측간신, 문신 등이 있으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마을 공동으로 모시는 동신신앙이 있고, 개인과 가정의 제액초복을 위한 푸닥거리, 재수굿 등을 행하는 무속신앙이 있다.

[수영지신밟기]는 역사 깊은 수영지역에서 오래전부터 농사와 어업의 풍요를 빌고 주민들의 안과태평과 복락을 위해 세시풍습으로 전래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수영야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민속놀이로서 정초에 놀이꾼들이 집집마다 순방하며 전곡(錢穀)을 추렴했는데 목적은 수영야류를 잘 연행하기 위한 경비의 조달이었지만 마을과 각 가정의 안녕과 만복을 기원하는 벽사(辟邪)의 의식이기도 했다.

일제시대인 1935년 마지막 연행을 끝으로 중단되었던 <수영지신밟기>와 <수영야류>가 해방이 되고 나서 1946년 처음으로 재현되었으며, 1971년 2월 [수영야류]가 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고, 그해 6월에 사단법인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가 발족되면서 [수영지신밟기]도 본격적인 보존, 전승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수영지신밟기]는 2007년 문화재 지정을 위한 고증 및 대본조사가 이루어 졌고, 이후 2008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민속예술축제에 부산대표로 참가 하는 가시적 성과를 이루었으나 답보상태에 놓였으며, 방광성 이사장 취임 이후 적극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마침내 [수영지신밟기]는 2014년 1월 1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수영지신밟기 소개


수영지신밟기 소개

특성

수영지신밟기 소개 "수영지신밟기"는 타 지역의 지신밟기와 비슷하지만 이 지역만의 특색도 있다.

첫 째, 수영의 [지신밟기]는 역사가 아주 깊다.

둘 째, 수영의 [지신밟기]는 [수영야류] 공연을 위한 걸립을 목적으로 행해지 는 놀이였다.

셋 째, 자고로 수영지역에는 우수한 풍물꾼들이 많아 수준 높은 가락으로 <지신 밟기>를 해왔다는 점이다.

넷 째, 수영의 [지신밟기] 가락은 단가식(短歌式)의 느린 매나리조로 시작하여 한참 하다가 점점 빠른 장단인 자진모리 박자로 넘어 간다. 즉 다른 지역 보다 풀이의 속도가 아주 느리다는 점이다.

다섯째, 수영에는 신령한 신위를 모신 송씨당과 최영장군 사당(祠堂)이 있어 이 사당에 고사를 지내고 신의 영험을 받아 [지신밟기]를 했다.

여섯째, 이 지역에는 옛날부터 수영성 사람들이 이용했던 먼물샘[遠水井]이란 큰 우물이 있어 좋은 물을 주었다. 수영의 <지신밟기> 때에는 반드시 이 우 물에 가서 고사를 지내고 이 놀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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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수영지신밟기 소개 • 기수==[水營地神밟기]1기

• 악사
호적 == 1명, 쇠잽이(설쇠잽이, 종쇠잽이) == 2명, 징잽이 == 2명,

장구잽이 == 6명, 북잽이 == 6명, 소고잽이 == 10명.

• 잡색
사대부 == 1명, 팔대부 == 1명, 포 수 == 1명, 집주인 == 1명, 마 님 == 1명, 머 슴 == 2명,

문서 잡이 == 1명, 사 령 == 1명, 마을사람들 ==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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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순서

수영지신밟기 소개 첫째마당 : 당산풀이 및 동네 우물풀이
1. 당산풀이
2. 우물풀이(먼물 샘)

둘째마당 : 대문(인사)풀이 및 한마당 춤 놀이
1. 대문풀이
2. 한마당 춤 놀이
3. 소고춤놀이
4. 북춤놀이

셋째마당 : 생원댁 풀이
1. 성주풀이(성주풀이와 달거리)
2. 조왕풀이
3. 장독풀이
4. 고방풀이
5. 삽짝(대문)풀이

넷째마당 : 마당밟기 및 기 소각제
1. 한마당 춤놀이
2. 마을사람들 합세
3. 기 소각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