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수영 어방놀이는 수영에 수군절도사영이 진을 치게 되자 거기에는 많은 군사들이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군사들뿐만 아니라 뒤에 인근의 축산포(丑山浦, 영해), 칠포(漆浦, 흥해), 포이포(包伊浦, 장기), 감포(甘浦, 경주), 개운포(開雲浦, 울산), 두모포(豆毛浦, 기장) 등지에 있었던 각 진영들이 모두 수영의 본영으로 옮겨와서 함께 있었기 때문에 만 명이 넘는 군사들이 모여 있었다 한다.
이 많은 군사들이 먹는 군량미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부식 또한 적은 양이 아니었으므로 이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래서 비번인 수군들은 그들이 먹을 부식을 마련하기 위해 바닷가로 나오게 되고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과 자연히 어울리게 되었다. 고기잡이 기술이 없는 이들은 자연히 인근에서 작업하는 어부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자연 협업(協業)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어부들은 이들의 도움으로 쉽게 그물을 당길 수 있었고, 수군들은 협조해 준 대가로 돌아갈 때 노력한 만큼의 물고기를 얻어 갈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오랫동안 계속 되면서 협업하는 제도적인 조직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마침내 수군과 어부들의 공동 작업체제인 ‘어방(漁坊)’ 이란 기구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漁坊’의 '漁'는 ‘고기잡을 漁’ 자로 고기를 잡는다는 의미이고, ‘坊’은 ‘마을 坊’ ‘관청 坊’자로 쓰이는 글자인데, 어방의 경우에는 ‘관청 坊’자로 쓰인 것 같다. 즉 수군과 어부들이 힘을 합쳐 고기잡이를 했던 공동 작업체를 말하는 것이므로 하나의 조직체를 뜻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좌수영 진영에서 나온 수군들과 인근의 어민들이 공동작업 협업체인 어방(漁坊)을 결성하여 고기잡이를 하므로써, ‘좌수영어방(左水營漁坊)’ 이 생겨났음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때의 ‘어방(漁坊)’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순수한 민간단체인 마을의 어촌계(漁村契)와 국가기관인 수산업협동조합(水産業協同組合)의 복합적인 성격을 띤 단체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